사시나무숲 _2020

공연에 앞서

요즈음 남자와 여자가 있다.
둘은 아직 가족이 아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들이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떤 가족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가족이 되고 싶을까?
점점 가족의 모습은 다양해져가고 있다. 가족의 역할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남자가 가장이 되거나, 여자가 가장이 되거나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가정적인 남자는 있어도 가정적인 여자는 없다는 우리는 어떤 가족인가?
과연 우리는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가족은 될 수 있는 것인가?
가족은!

가족이 뭐길래?

같은 공간에서 부모와 자식, 또는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가족을 이룬다. 가족의 숫자는 계속 달라지고 있는데 요즈음은 자녀를 두지 않는 2인 가족도 많아지는 추세다. 그리고 반려견, 반려묘 심지어 반려 식물들도 가족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제 하나 더 1인 가족도 가족의 구성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생각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각자의 독립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가 곧 가족의 시작이다.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가족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곧 가족 The Family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가족의 문을 열어 서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또 다른 가족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가족의 기준이 되는 혈연구성이 갖는 절대적인 지위는 차츰 약해지고 있다.

생물학적 출생의 신비, 유전적인 동일성 등등 여러 기준의 가족이 있어 안전과 생존의 울타리를 쳤지만 반대로 굴레가 되어 우리 서로를 옭아 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선택하는 가족은 언제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곁에 남아 있을 것인가?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인가?

사시나무숲

판도(Pando)는 사시나무가 몇 만 년을 가족으로 자라온 군락이다. 유타 주에 있는 데 오랜 세월의 역경을 이겨내고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 비해 지금은 좀 쇠락하는 모습이지만 땅 속에서 서로 연결된 뿌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다. 그 자리에서 죽거나 그 자리에서 같이 살거나. 땅 위의 화재와 경쟁하는 다른 나무, 또는 새순을 먹는 사슴 등등의 공격에 맞서 사시나무는 땅 밑에서 뿌리로 존재하면서 필요할 때에 새순을 계속 땅위로 낸다. 순이 뽑혀도 뿌리는 뽑히지 않는 사시나무는 다시 숨을 고르고 순을 낸다. 작은 바람에도 사시나무 떨듯하지만 무려 20m를 넘게 자란다. 그렇게 자라도록 뿌리는 엄청난 양의 물을 빨아들인다. 땅 위의 나무가 자라도록.

죽어도 가족

혹시 내가 바라는 가족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비록 내가, 또는 나를 힘들게 만들어어도 무한의 수분을 공급해주는 사시나무가 살아가는 모습 말이다. 한 뿌리에서 자란다 하더라도 땅 위의 그들은 한 그루의 나무로 살아간다. 그 뿌리의 기원을 몇 만 년 전으로 돌리기 전에는 그들이 하나였던 기억이 나지 않을 것처럼 우리도 땅 위에 살아가는 하나 하나의 사람이다. 그 사람 하나가 가족의 시작이다. 너와 내가 만나야 가족(the Family)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families)이 되는 것이다.

한 번 가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 그것으로 연결된 우리는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육체적인 뿌리, 정식적인 뿌리, 사회적인 뿌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인데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에게 또는 먼저 생을 달리한 가족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또 될 것인가?

지금 나는 가족이란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정의를 내릴 것인가 계속 찾아가보고자 한다. 죽을 때 까지.

2020.01.22 ~ 02.02 대학로 물빛극장

작 / 연출 – 백운철
무대 – 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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